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척의 일생 후기 (역순 구성, 인생 회고, 마이크 플래너건)

by 씨네로거 2026. 3. 8.

오랜만에 영화관을 나서면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최근 《척의 일생(The Life of Chuck)》을 보고 나서 정확히 그런 상태가 됐습니다. 제목만 보면 누군가의 전기 영화 같아서 별 기대 없이 틀었는데, 보고 나니 제 삶의 어떤 순간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스티븐 킹 원작에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1시간 50분 동안 한 사람의 우주를 보여주는 독특한 판타지 드라마입니다. 지금은 쿠팡 플레이에서 유료로 볼 수 있는데, 톰 히들스턴을 비롯한 마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연기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3막→2막→1막, 역순으로 펼쳐지는 한 사람의 우주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입니다. 여기서 서사 구조란 이야기를 전달하는 순서와 방식을 의미하는데, 《척의 일생》은 일반적인 시간 순서를 뒤집어 3막부터 시작합니다. 3막에서는 세상이 멸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혼란스러운 현재가 펼쳐지고, 2막에서 척의 어른 시절, 1막에서 유년 시절이 나옵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구조인가 싶었는데,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됩니다.

 

영화는 교사인 남자 주인공 마티가 전처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세상 곳곳에서 싱크홀이 발생하고, 해일이 밀려오며, 인터넷이 끊깁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고, 병원에서는 의료진이 도망가고 환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던 마티의 눈에 이상한 광고가 보입니다. "39년 동안 고마웠어요, 척." TV와 라디오에서도 같은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대체 척은 누구일까요?

 

저는 이 구성이 정말 신선하다고 느꼈습니다. 일반적인 전기 영화처럼 탄생부터 죽음까지 순서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결말부터 보여주고 그 의미를 역추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척의 세계가 곧 척의 우주라는 설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건 척이 39살에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고, 그 세계를 채우는 사람들은 척의 인생에서 스쳐 지나간 이들입니다. 영화 속 선생님이 어린 척에게 "네 안에는 무궁무진한 우주가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길거리 댄스 장면, 기적 같은 순간의 교차

2막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회계사인 척이 길을 걷다가 버스킹 하는 드러머의 소리에 꽂혀서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모르는 여자를 끌어들여 둘이 즉흥 커플댄스를 추는데, 사람들이 환호하고 셋 다 도파민이 폭발하는 그 순간 — 저는 웃음이 나왔다가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척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춤을 엄청 좋아했고, 함께 춤추던 기억이 있으며, 댄스 동아리에도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회계사가 됐습니다. 이성적인 삶을 살다가, 그날 드럼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본능이 깨어난 것입니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잠재 기억(Implicit Memory)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잠재 기억이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 장면이 왜 이렇게 강렬했는지 돌이켜보니, 각자의 우주가 교차하는 순간을 보여줬기 때문이었습니다. 척뿐만 아니라 드러머와 남자에게 차인 여자에게도 그 순간은 기적 같은 한 장면이었습니다. 영화는 특이하게도 척의 내레이션뿐만 아니라 그 둘의 내레이션도 들려줍니다. 평소처럼 버스킹 하던 드러머에게, 실연으로 절망하던 여자에게, 그 순간은 각자 인생의 빛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돌이켜보면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컴퓨터 학원을 보내주고, 처음으로 게임을 접했던 것 — 그때는 그냥 재미있어서 했던 일이 지금의 제 커리어를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에는 그게 내 삶을 바꾼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미국심리학회(APA)에 따르면, 인간의 기억은 감정이 강하게 결부된 순간을 더 선명하게 저장한다고 합니다  영화 속 댄스 장면이 바로 그런 감정적 각인(Emotional Imprinting)의 순간이었습니다. 감정적 각인이란 강렬한 감정을 동반한 경험이 장기 기억으로 남는 현상을 뜻합니다.

다음은 이 영화가 다루는 핵심 요소입니다:

  • 한 사람의 삶이 하나의 우주라는 철학적 메시지
  • 과거 경험이 현재 행동에 미치는 무의식적 영향
  • 타인과의 우연한 교차가 만드는 기적적 순간

담담한 내레이션과 잔잔한 여운

이 영화는 판타지 요소를 담고 있지만, 슬프기보다는 희망차고 따뜻합니다. 내레이션이 감정을 과하게 얹지 않고 담담하게 흘러가는데, 그게 오히려 더 여운이 깊었습니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객관적인 톤으로 척의 삶을 짚어주는 방식이 제게는 더 와닿았습니다.

 

1막에서는 약간의 호러 요소가 등장합니다. 다락방이 중요한 소재로 나오는데, 척이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설정이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이 가진 철학적 깊이를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이 영상으로 잘 풀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가 모든 사람에게 S티어는 아닐 수 있습니다. 길거리 댄스 장면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나머지가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고, 메시지가 너무 친절해서 영화적으로 느끼게 하기보다 설명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역순 구조도 신선하지만, 막상 보면 서사적 긴장감을 크게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충분히 좋은 영화였습니다. 잔잔하고 여운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고 싶은 분이라면 추천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제 과거의 어떤 순간들이 자꾸 떠올랐고, "아, 그때 그게 이렇게 중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로 딱 규정되지 않고, 각자의 우주가 모여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메시지가 공감됐습니다.

 

《척의 일생》은 한 사람의 삶을 전부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만든 결정적인 순간들만 캐치해서 보여줍니다. 그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척이라는 한 사람의 우주를 만들어냈고, 그 우주가 다른 우주와 만나는 순간에는 폭발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끝을 알면서도 삶은 아름답다는, 독특하면서도 희망적인 이야기였습니다. OTT에 풀리면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2MnCy5B9cY8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머니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