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녹화를 두 개나 끝내고 나니 오늘은 좀 한가했습니다. 영화 한 편 볼까 하고 시간표를 훑어보다가 <왼손잡이 소녀>가 딱 한 타임 걸려 있더군요. 포스터에 나온 꼬마의 표정이 묘하게 귀여워서, 그리고 션 베이커 감독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별 망설임 없이 표를 끊었습니다. 극장을 나서며 든 생각은 "이거 정말 사람이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였습니다. 대만 타이베이의 야시장 풍경이 생생하게 담긴 이 영화는, 아이폰으로 촬영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현장감이 살아 있었고, 싱글맘과 두 딸의 팍팍한 삶을 따라가면서도 묘하게 힐링이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아이폰 한 대가 포착한 타이베이 야시장의 생생함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대만 영화라고 하면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청춘 로맨스 정도만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왼손잡이 소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영화였습니다.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과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 작품은, 션 베이커 감독의 오랜 제작 파트너인 제우스칭 감독이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았고, 션 베이커가 제작·각본·편집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여기서 션 베이커(Sean Baker)란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아노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감독으로, 주로 사회 하층민의 삶을 날것 그대로 담아내는 작업을 해온 인물입니다. 그가 참여한 이 영화는 아이폰으로만 촬영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화제성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전문 카메라가 진입하기 어려운 타이베이 야시장의 좁은 골목과 소란스러운 소음을 가감 없이 포착하기 위한 선택이었죠.
실제로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저기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야시장에서 엄마가 국수를 팔고, 막내딸이 그 사이를 쫄랑쫄랑 돌아다니는 장면들은 마치 제가 그 현장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했습니다. 사람들이 "팔아요, 팔아요" 외치는 소리, 오토바이가 쌩쌩 지나가는 소음, 그 모든 게 살아 숨 쉬는 느낌이었죠. 아이폰 카메라가 꼬마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찍은 장면들은, 아마도 그 주변의 상인들이 실제 일반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웠습니다(출처: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카탈로그).
왼손이라는 낙인, 그 안에 담긴 사회적 편견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왼손잡이'는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사회가 덧씌운 낙인을 상징합니다. 막내딸은 왼손잡이인데, 외할아버지는 왼손을 "악마의 손"이라 부르며 쓰지 못하게 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대만 사회의 보수성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왼손잡이를 교정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대만은 그 정도가 더 심한 듯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꼬마가 할아버지의 말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나쁜 짓 할 때만 왼손을 쓴다"는 자기만의 규칙을 만든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이 강요한 편견을 아이다운 순수한 논리로 받아쳐 버리는 이 설정은, 동시에 굉장히 서글픈 풍자이기도 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며 느낀 건, 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사회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엄마는 싱글맘이고, 첫째 딸은 학교를 자퇴했으며, 막내는 왼손잡이입니다. 겉에서 보면 전부 '문제'로 낙인찍히기 쉬운 조건들이죠. 영화는 남아선호 사상(male preference)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대만 사회를 배경으로, 이런 편견들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지 조용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남아선호 사상이란 아들을 딸보다 선호하는 유교 문화권의 오래된 관습으로, 대만에서는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출처: 대만 국가발전위원회).
빈곤을 소비하지 않는 따뜻한 시선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놀랐던 건, 가난을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싱글맘인 엄마는 야시장에서 국수를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첫째 딸은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엄마를 돕습니다. 월세를 못 내면 쫓겨날 상황이고, 막내는 어린이집을 오가며 엄마 가게에서 서빙을 거들기도 합니다. 이런 설정만 들으면 되게 팍팍하고 슬플 것 같지만,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전체의 톤(tone)은 굉장히 아기자기하고 유머러스합니다. 여기서 톤이란 영화가 전달하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감정의 온도를 의미하는데, <왼손잡이 소녀>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도 웃음과 일상의 리듬을 잃지 않습니다. 자극적이고 딥한 내용이 담긴 장면들도 분명 나오지만, 그것들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흘러간다"는 메시지를 담담하게 전달하죠.
저는 이 지점에서 영화가 가난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흔히 빈곤을 다룬 영화들은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눈물을 짜내는 신파로 흐르기 쉽습니다. 하지만 <왼손잡이 소녀>는 세 모녀를 '불쌍한 사람들'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존엄한 개인들입니다. 엔딩 장면도 굉장히 희망적인데, 위태위태한 가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걸 보여주며 마무리됩니다.
날것의 연기와 리얼리즘의 힘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제가 전혀 모르는 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모녀—엄마, 첫째 딸, 막내—의 연기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특히 첫째 딸 역을 맡은 배우는 감정의 기복이 엄청나게 큰 역할을 소화해 내는데, 그 낙차를 자연스럽게 표현해 냈습니다. 제가 보면서 "이거 진짜 카메라 한 대 놓고 그냥 찍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날것의 연기들이 쭉 이어집니다.
영화의 리얼리즘(realism)은 단순히 현실을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여기서 리얼리즘이란 인위적인 연출을 최소화하고 실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영화적 접근 방식을 말합니다.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왼손잡이 소녀>가 훨씬 더 희망적이고 아기자기하다는 점입니다.
조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야시장에서 만물상을 운영하며 엄마를 은근히 좋아하는 아저씨(제가 보기엔 최기하 씨와 좀 닮았습니다), 첫째 딸이 일하는 슈퍼의 사장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모들까지 모두 자연스럽고 입체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한 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냥 세 모녀의 일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었고, 마지막엔 힐링까지 되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제 와이프는 "지루하지 않았고 좋았다"며, 자기가 예전에 대만 여행 갔을 때 봤던 시장의 모습이 떠올라서 더 재밌게 봤다고 했습니다. 대만 영화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저로서는, 이번 경험이 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개봉관이 많지 않아서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감성을 좋아하면서도 좀 더 대중적이고 따뜻한 가족 드라마를 원하는 분들께는 강력히 추천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 S 티어를 주고 싶습니다. 올해 본 영화 중에서도 단연 상위권에 들 만한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