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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후기 (초중반 편집, 배우 연기력, 후반부 감동)

by 머니윙 2026. 3. 1.

영화관을 나서면서 "아, 이 좋은 재료로 요리를 이렇게밖에 못 하다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유배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인데, 예고편만 봤을 때는 <광해>급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올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라는 검증된 배우진에 역사적 비극을 인간적 시선으로 재해석한 소재까지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극장에 앉아 2시간을 보내고 나니, 초중반부의 투박한 편집과 과도한 코미디 톤이 영화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렸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도 후반부 배우들의 열연이 무너진 서사를 간신히 붙잡아 준 덕분에, 완전한 실패작은 아닌 'B 티어' 영화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초중반 편집의 투박함, 감정선 빌드업 실종

영화를 보면서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장면 전환의 매끄럽지 못한 흐름이었습니다. 마치 유튜브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듯 중요한 장면들만 툭툭 끊어져 나열되는 느낌이었고, 인물들의 감정이 쌓이는 과정은 생략된 채 결과만 화면에 던져주는 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빌드업(build-up)'이란 이야기의 긴장감과 감정을 점진적으로 쌓아가는 연출 기법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독자나 관객이 서서히 몰입하도록 만드는 과정인데, 이 영화는 그 과정이 거의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왕(박지훈)과 마을 사람들이 교감하는 과정이 너무 단조로웠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반목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친해져 있는 식이었고, 그 중간의 에피소드들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촌장의 아들이 왕에게 글을 배우는 장면도, "글 가르쳐주세요" → "네" → 다음 장면에서 이미 글을 배우고 있는 모습으로 넘어가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둘이 서먹하게 시작해서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 예컨대 왕이 처음엔 거부하다가 아들의 간절함에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는 디테일한 장면들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절벽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왕을 욕하는 장면 역시 위화감이 컸습니다. 앞뒤 맥락 없이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고,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또 화해 분위기로 넘어가는 식이어서, 감정의 기복이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가 '주요 장면 모음집'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중요한 순간들은 다 담겨 있지만, 그 순간들을 연결하는 '기름칠' 같은 장면들이 부족해서 전체적인 흐름이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특히 호랑이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CG 퀄리티가 너무 조악해서 감동이 반감되었습니다. 호랑이는 단순한 야생동물이 아니라 왕의 내면적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치였는데, 그 장면이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어설프게 처리된 점은 정말 아쉬웠습니다.

배우 연기력만으로 버틴 영화

그나마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든 건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었습니다. 유해진은 초반부터 과도한 코미디 톤으로 극의 균형을 해치긴 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촌장으로서의 무게감과 인간적인 따뜻함을 동시에 표현하며 영화를 붙잡아줬습니다. 특히 왕과의 이별 장면에서 보여준 절제된 감정 연기는, 과장 없이도 관객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박지훈은 유약하면서도 강단 있는 단종의 이중적 면모를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이중적 면모'란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왕으로서의 자존심과 의지를 품고 있는 복합적 성격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한 인물 안에 상반된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하는 상태인데, 박지훈은 이를 눈빛 하나, 말투 하나로 자연스럽게 구분해 냈습니다. 다만 영화의 편집 문제로 인해 그의 캐릭터 변화 과정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점은 배우 입장에서도 억울할 것 같습니다.

 

유지태는 한명회 역할로 압도적인 빌런 아우라를 뿜어냈습니다. 그의 등장만으로도 화면의 긴장감이 확 올라갔고, 특히 유배지를 선정하는 장면에서 보여준 냉소적인 미소는 권력의 무게를 단번에 느끼게 했습니다. 전미도 역시 매화 역할로 절제된 감정 연기를 선보였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준 눈물 어린 표정은 대사 없이도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만점이었지만, 이들의 노력을 충분히 살려주지 못한 연출과 편집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요리를 망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증명한 셈입니다.

후반부 감동, 그러나 아쉬움은 남는다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영화는 비로소 제 궤도를 찾았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달으면서, 왕과 마을 사람들의 유대감이 본격적으로 조명되었고,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비로소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울지는 않았지만, 몇몇 장면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특히 왕이 마을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장면은, 비록 앞선 빌드업이 부족했음에도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충분히 감동적이었습니다.

 

다만 이 감동이 더 큰 울림을 주지 못한 이유는, 역시 초중반부의 허술한 전개 때문이었습니다. <광해>가 왜 명작으로 평가받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는 앞부분부터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선을 촘촘하게 쌓아 올렸기 때문에 후반부의 카타르시스가 훨씬 강렬했습니다. 여기서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억눌렸던 감정이 해소되면서 느끼는 정화와 해방감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울거나 웃으며 감정을 쏟아내고 나서 느끼는 후련함인데, 이 영화는 그 강도가 기대보다 약했습니다.

 

또한 매화(전미도)의 에피소드가 거의 없었던 점도 아쉬웠습니다. 왕과 함께 유배지로 온 유일한 인물인 만큼, 그녀의 내면과 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줄 수 있는 짧은 장면 한두 개만 추가되었어도 마지막 장면의 감동이 배가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영화를 완전히 실패작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사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무게감, 역사적 비극을 인간적 시선으로 재해석한 소재의 힘,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혼이 담긴 연기 덕분에 영화는 최소한의 완성도를 유지했습니다. 국내 영화 시장에서 사극은 여전히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장르이며, 특히 역사적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조명하는 작품들은 꾸준히 관객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결론적으로 <왕과 사는 남자>는 천만 영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만, 연출과 편집의 미숙함으로 그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작품입니다. 만약 초중반부의 감정선 빌드업이 더 촘촘했다면, 그리고 CG 등 기술적 완성도가 조금 더 높았다면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력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이며, 큰 기대 없이 배우들의 열연을 감상하러 간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에 B 티어를 주고 싶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실패작도 아닌, 아쉬움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_umuUDRw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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