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가부키가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냥 일본 예능에서 괴상한 분장을 하고 나오는 그 모습 정도만 알고 있었죠. 그런데 일본에서 실사 영화로는 22년 만에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영화 《국보》를 개봉 당일 극장에서 봤습니다. 2시간 54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때문에 망설였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3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가부키를 몰라도 괜찮을까요?
처음 영화가 시작되고 가부키 공연 장면이 나왔을 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낯선 문화였거든요.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니 그런 걱정은 완전히 기우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가부키 공연이 나올 때마다 자막으로 그 공연이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어 "강한 아들을 키우기 위해 벼랑에서 떨어뜨리는 사자의 이야기" 같은 식으로요. 그래서 가부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가부키 공연들이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각 공연 장면은 그 순간 주인공들이 처한 심리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건지, 실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절묘하게 맞물려 있었죠.
사실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가부키 자체가 아닙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예술의 극한, 즉 '국보'라는 경지에 도달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부키는 그 여정을 보여주는 무대 장치일 뿐이에요.
천만 관객을 사로잡은 두 남자의 이야기
영화는 1960년대, 야쿠자 신년회에서 우연히 발견된 천재 소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 한지오가 야쿠자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죠.
여기서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야쿠자 아들 키쿠오와 가부키 명문가의 적통 후계자 슈스케. 둘은 같은 나이에 같은 학교를 다니며 친구처럼 지냅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키쿠오에게는 재능이 있지만 핏줄이 없습니다. 슈스케에게는 핏줄이 있지만 키쿠오만큼의 재능은 없죠.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건, 이 둘이 서로를 향한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특히 키쿠오가 슈스케에게 "나에게 필요한 건 너의 혈통이다. 네 피를 먹고 싶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한 처절한 갈망이었죠. 그 순간 저는 이 영화가 단순한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습니다.
연기가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요시자와 료와 요코하마 류세이, 이 두 배우의 연기는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배우들이 얼마나 가부키 연습을 했을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1년 반을 훈련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특히 놀랐던 건, 이 배우들이 젊은 시절부터 중년까지의 변화를 완벽하게 소화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분장이나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겪는 수많은 일들로 인해 달라진 내면까지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슈스케가 키쿠오의 공연을 보고 "나는 안 되는구나"라는 걸 깨닫는 장면이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만으로 모든 게 전달됐죠. 저는 그 장면에서 정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와타나베 켄을 비롯한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실제 가부키 집안 출신인 테라지마 신호부가 연기한 어머니 역할은 리얼리티가 남달랐습니다. 걸리는 연기가 하나도 없었고, 모든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듯했습니다.
3시간이 짧게 느껴진 이유
사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3시간이라는 시간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인터미션도 없다고 하니 더욱 걱정됐죠. 하지만 막상 보니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일 감독의 연출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저는 이 감독님이 제일교포 3세라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재일교포로서 일본에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온 분이더군요. 파칭코 시즌2의 일부 에피소드도 연출하셨다고 합니다.
감독은 사건을 나열하는 대신 인물들의 심리 변화에 집중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인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폭발하고, 다시 봉합되고, 또다시 균열이 생기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영상미도 놀라웠습니다. 특히 시작부터 등장하는 눈 내리는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고, 가부키 공연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 같았습니다. 거기에 더해진 음악은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정말 좋아합니다. 빠른 전개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영화 말이죠. 《국보》는 제 취향을 정확히 저격한 작품이었고, 엔딩까지 완벽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아내와 함께 극장을 나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영화는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그 이면의 어두운 모습도 보여주더라." 맞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술가의 삶 뒤에는 처절한 집착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단순한 성공 신화가 아닌 이유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섬세한 심리 묘사를 좋아하고,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하는 걸 즐기신다면 《국보》는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겁니다. 저에게는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였고, 주저 없이 트리플 S 티어를 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극장에서 꼭 경험해 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