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처음엔 8부작을 하루 만에 정주행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첫 에피소드를 보는 순간, 멈출 수가 없더군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당신이 죽였다》는 가정폭력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범죄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드라마는 피해자의 고통만 부각하거나, 범죄 수법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방관자'라는 제3의 시선까지 포착해 낸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초반 빌드업이 만든 설득력
일반적으로 "친구의 남편을 죽이자"는 극단적 선택은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 드라마의 초반부는 그 비상식적인 결정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립니다.
주인공 은수(전소니)가 친구 희수(이유미)의 가정폭력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녀가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치밀하게 그려집니다. 은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을 목격하며 장롱 속에 숨어 지내던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를 안고 있습니다. 여기서 트라우마란 강렬한 충격적 경험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이후 행동과 판단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상처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은수가 담당하던 백화점 VIP 고객의 부인이 가정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사건을 겪으면서, 그녀의 내면에 쌓인 죄책감과 무력감은 극에 달합니다. 이러한 심리적 동기부여(Motivation)는 단순히 친구를 돕는 수준을 넘어, 자신이 과거에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속죄의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출처: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제가 보기엔 이 빌드업이 없었다면, 후반부의 극단적 선택은 설득력을 잃었을 겁니다.
특히 소름 돋았던 장면은 시어머니(김미숙)가 며느리 희수의 얼굴 상처를 보고 "내 아들이 돌아왔구나"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이는 가해자를 만드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폭력성이 아니라, 그것을 묵인하고 조장해 온 주변 환경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연출이었습니다.
방관자 효과를 다룬 메시지
이 드라마의 제목 '당신이 죽였다'는 물리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두 여자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가정폭력을 알고도 외면한 모든 '당신'들, 즉 방관자(Bystander)를 가리킵니다.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란 위급한 상황에서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아무도 나서지 않는 심리 현상을 뜻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드라마 속 가해자 노진표(장승조)의 가족 구성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 어머니: 여성학자로서 강연에서는 여성 인권을 외치지만, 정작 아들의 폭력은 방치합니다
- 여동생(이호정): 엘리트 경찰이지만 오빠의 범죄를 덮으려 애씁니다
- 이웃 주민: 위층에서 들리는 비명을 듣고도 귤 한 봉지 건네는 것으로 양심을 달랩니다
일반적으로 가정폭력 드라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로 그려지는데, 이 작품은 그 사이에 존재하는 방관자들의 복잡한 심리까지 포착했습니다. 제가 직접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지점도 바로 여기였습니다. 나 역시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거든요.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
초반의 심리적 빌드업이 탄탄했던 것과 달리, 중반 이후 범죄 스릴러로 전환되면서는 몇 가지 아쉬운 지점이 드러납니다. 저는 특히 진소백(이무생) 캐릭터의 활용이 너무 편의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소백은 중국 식자재 도매상 사장으로, 극 중에서 여자 주인공들을 돕는 핵심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이토록 위험을 감수하며 이들을 돕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물론 그의 과거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살인 은폐까지 돕는 수준의 개입을 정당화하기엔 약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범죄 스릴러에서 조력자 캐릭터는 명확한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진소백은 마치 '만능 해결사'처럼 등장해 모든 문제를 풀어버립니다.
더 큰 문제는 엘리트 경찰로 설정된 노아라(이호정)의 캐릭터입니다. 그녀는 청와대 경호처를 꿈꾸는 야심 찬 경찰이지만, 정작 증거물(시신)을 자기 집 창고 차 트렁크에 보관하다 어머니에게 들킬 뻔하는 등 너무 허술한 모습을 보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런 설정은 극의 긴장감을 위한 '고구마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고구마 캐릭터(Frustrating Character)란 답답한 행동으로 시청자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인물을 뜻하는 드라마 용어입니다.
또한 백화점 직원 위정국(위 씨 역)이 몇 번이고 탈출에 성공하는 장면은 개연성이 떨어졌습니다. 감금 상태에서 물 한 잔 달라고 해서 가까이 오게 만든 뒤 도망치는 클리셰는 너무 식상했거든요.
연기와 연출의 명암
배우들의 연기는 전반적으로 훌륭했습니다. 특히 이유미는 《오징어 게임》, 《미스터 플랑크톤》에 이어 또다시 사연 깊은 피해자 역할을 완벽히 소화했습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의 두려움과 무력감을 표현하는 그녀의 눈빛 연기는 압권이었습니다.
장승조는 1인 2역(가해자 노진표 + 조선족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습니다. 저는 사실 장승조라는 배우를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 제대로 인식했는데, 두 캐릭터의 말투와 눈빛까지 완전히 다르게 연기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일반적으로 1인 2역은 자칫 어색할 수 있는데, 그는 두 캐릭터를 완전히 분리해 냈습니다.
반면 전소니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몇몇 중요한 순간에 조금 더 극단적인 감정 표현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친구의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이라면, 그 내면의 광기나 절박함이 좀 더 강렬하게 드러났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직접 보면서 "여기서 한 번 더 질러줬으면" 싶었던 장면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이호정의 경우, 《굿보이》에서 보여준 발랄한 빌런 연기와는 달리, 여기서는 냉혹하고 계산적인 경찰 역할을 맡았는데 아쉽게도 그 매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습니다. 캐릭터 자체가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진실을 묻으려는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가졌는데, 이호정의 연기에서는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이 덜 전달됐습니다.
정리하면, 《당신이 죽였다》는 가정폭력과 방관자 효과라는 무거운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범죄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으려 한 작품입니다. 초반부의 탄탄한 심리 묘사와 배우들의 열연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중반 이후 편의적 전개와 개연성 부족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럼에도 8시간을 단숨에 몰아보게 만드는 흡입력은 분명 존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 자신이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계속 질문하게 됐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루 저녁 몰입할 만한 드라마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